[기획] 20주년 앞둔 ‘슈퍼6000’ 증발 위기, ‘슈퍼레이스 챔피언십’ 2027 로드맵이 남긴 악수(惡手)
[고카넷, 글=남태화 기자] 대한민국 모터스포츠의 자존심이자 최고봉으로 군림해 온 ‘슈퍼6000(Super 6000)’ 클래스의 명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는 슈퍼레이스 챔피언십 조직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2027년 대전환 로드맵’에 따른 결과다.
조직위는 글로벌 표준에 맞춘 단계형 클래스(S1~S4) 도입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이는 지난 19년간 국내 모터스포츠의 상징이었던 메인 클래스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고, 수많은 드라이버와 팀이 쌓아 올린 기록의 가치를 단숨에 퇴색시키는 ‘역사적 단절’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아시아 최초 스톡카’가 가진 19년 아카이브의 붕괴]
2008년, 아시아 최초로 스톡카 레이스를 도입하며 출범한 ‘슈퍼6000’ 클래스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프로 레이스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원년 멤버이자 통산 3회 챔피언을 기록한 김의수를 비롯해 밤바 타쿠, 조항우, 정의철, 최명길, 이찬준, 김재현, 그리고 디펜딩 챔피언 이창욱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최정상급 드라이버들이 이 클래스를 거치며 수많은 명승부와 기록을 남겼다.
모터스포츠에서 클래스의 명칭은 단순한 이름표가 아니다. 수만 분의 1초를 다투며 축적된 라운드별 우승 기록, 폴 포지션 횟수, 코스 레코드, 그리고 팀과 드라이버의 통산 데이터가 응축된 ‘역사적 자산’이자 스토리텔링의 근간이다.
그러나 클래스 출범 20주년을 맞은 2027년부터 슈퍼6000 클래스가 단순한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인 ‘S1’으로 변경되면, 기존 슈퍼6000 체제에서 정립된 19년간의 방대한 아카이브는 연속성을 잃고 단절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는 프로야구의 통산 홈런 기록이나 프로축구의 통산 득점 기록이 리그 명칭 개편을 이유로 ‘과거의 번외 기록’으로 취급받는 것과 다름없는 처사다. 특히, 팬들과 미디어가 공유해 온 역사적 서사 체계가 한순간에 증발하는 셈이다.
[외형적 ‘글로벌 표준’에 매몰된 정체성 상실]
슈퍼레이스 챔피언십이 표방한 S1~S4 체제는 유럽이나 글로벌 모터스포츠의 피라미드 구조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이는 대한민국 모터스포츠 시장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공상적 설계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국내 팬들에게 ‘슈퍼6000’은 6,200cc 스톡카 특유의 거친 배기음과 야성적인 레이스를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독보적인 브랜드 레이블이었다.
이를 버리고 선택한 ‘S1’이라는 무미건조한 명칭은 대회 최고 클래스가 가진 상징성과 무게감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국내 최고 레이스라는 직관적인 인식을 심어주기 어렵다.
더욱이 2027년 클래스 명칭 변경을 강행하면서 정작 새로운 메인 머신의 도입을 2028년으로 미뤄둔 점은 이번 개편의 모순을 극명히 드러낸다. 명칭은 바뀌었으나 알맹이는 기존 노후화된 스톡카를 그대로 쓰는 기형적인 ‘과도기 시즌’이 예고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역사적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메인 클래스가 관람객과 스폰서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급기야 일각에서는 슈퍼6000 클래스를 없애기 위한 수순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하는 상황이다.
[기록의 가치 훼손, 팬과 미디어에 대한 직무유기]

모터스포츠의 흥행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기록의 경쟁에서 나온다. ‘슈퍼6000 클래스 통산 최다승’, ‘역대 최연소 슈퍼6000 챔피언’과 같은 타이틀은 드라이버에게는 최고의 명예이자, 팬들에게는 역사를 즐기는 소중한 콘텐츠였다.
대회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주최 측이 앞장서서 이 역사적 가치를 단절시키는 것은 지난 19년간 대회를 지켜온 팀, 드라이버, 그리고 팬들에 대한 직무유기에 가깝다.
금융·재정적 보증 수표 없는 승급 제도가 ‘돈 있는 이들의 리그’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빛나던 ‘최상위 클래스의 명예와 기록’마저 행정 편의주의적 개편으로 훼손되는 현실은 씁쓸함을 자아낸다.
글로벌 표준이라는 화려한 포장지 속에서 정작 알맹이인 ‘역사와 정통성’을 잃어버린 슈퍼레이스 챔피언십. 2027년 그들이 마주할 미래가 대한민국 모터스포츠의 진화일지, 아니면 찬란했던 19년 역사의 퇴보일지, 냉정한 재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사진제공 = 한국모터스포츠기자협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