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슈퍼6000’ 이름 지우는 슈퍼레이스 2027 로드맵… 글로벌 표준의 ‘빛’과 정통성 상실의 ‘그늘’
[고카넷, 글=남태화 기자] 대한민국 프로 모터스포츠의 자존심이자 최고봉으로 군림해 온 ‘슈퍼6000(Super 6000)’ 클래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주식회사 슈퍼레이스가 최근 발표한 ‘2027년 대전환 로드맵’에 따르면, 대회는 2027 시즌부터 글로벌 표준에 맞춘 S1~S4 단계형 승급 체계로 전면 개편된다.
대회의 간판이자 단일 클래스 최초로 통산 100경기를 돌파하며 대한민국 모터스포츠의 상징이 된 ‘슈퍼6000’이라는 명칭은 이제 ‘슈퍼 S1 챔피언(Super S1 Champion)’으로 대체된다.
선진국형 모터스포츠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주최 측의 포부 뒤에는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역사적 가치의 훼손과 기록 정리의 혼란이라는 짙은 그늘이 드리우고 있다. 이에 이번 개편이 가져올 명과 암을 짚어본다.
[명(明)] 글로벌 표준 안착과 지속 가능한 육성 생태계
슈퍼레이스가 명칭 변경을 감수하면서까지 대수술을 감행한 이유는 명확하다. 파편화되어 있던 국내 레이스 클래스를 유기적으로 통합해 드라이버의 ‘성장 사다리’를 완성하겠다는 취지다.
먼저 기존 구조에서는 하위 클래스(GT 클래스 등)에서 우승하더라도 최상위 클래스인 슈퍼6000으로 진입할 수 있는 명확한 경로가 부족했다.
하지만, 2027년 개편안은 입문 단계인 슈퍼 S4(루키)부터 S3(챌린지), S2(프로암 내구레이스 및 GTA)를 거쳐 최상위 S1까지 이어지는 명확한 승급 체계를 제공한다.
특히, 하위 클래스 우승자에게 상위 클래스 진출 지원 혜택을 연계함으로써 젊고 유망한 드라이버들이 프로 무대로 진입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생태계가 마련된다.
두 번째로 유럽의 GT 레이스, 미국의 IMSA, 일본의 슈퍼다이큐 등 모터스포츠 선진국들은 이미 드라이버 등급제와 경주차 규격에 맞춘 단계별 클래스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슈퍼레이스의 이번 개편은 해외 시리즈와의 규격 호환성을 높이고, 궁극적으로 국내 팀과 드라이버가 글로벌 무대로 확장하거나 해외 드라이버가 국내 리그에 유입되기 용이한 환경을 조성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마케팅 및 확장성 강화이다. 단계형 네이밍(S1~S4)은 모터스포츠를 잘 모르는 일반 대중과 미디어에게 대회의 직관적인 구조를 인지시키는 데 유리하다.
또한, S2 클래스에 도입되는 GT4, GTC 등 고성능 컵카 기반의 레이스는 글로벌 완성차 제조사들의 참여와 고객 레이싱(Customer Racing) 시장을 활성화하는 촉매제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암(暗)] 20년 역사의 증발, 그리고 데이터 파편화의 혼란
하지만 모터스포츠 안팎에서는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굳이 클래스의 ‘이름’까지 완전히 지워야 했느냐는 본질적인 의문이다.
먼저 슈퍼6000은 단순한 클래스 명칭이 아니다. 대한민국에 프로 모터스포츠가 뿌리내린 이후 최고 권위의 무대를 뜻하는 대명사이자 고유 브랜드였다.
슈퍼6000 클래스는 메인 스폰서가 바뀔 때마다 SK ZIC 6000, 캐딜락 6000, ASA 6000, 삼성화재 6000, 토요타 가주 레이싱 6000 등으로 타이틀은 변했지만, ‘6000’이라는 본질은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가운데 단일 클래스 최초 100경기 돌파라는 대기록의 역사성마저 ‘Super S1’이라는 다소 건조하고 흔한 명칭 속에 묻히게 되면서 팬들이 느끼는 정통성과 서사의 단절은 피할 수 없게 됐다.
두 번째는 기록 정리의 혼돈과 아카이브의 단절이다. 네이밍 스폰서 변경에 따른 일시적 명칭 수정과 달리 클래스 체계의 완전 변경은 모터스포츠 역사 기록 관리에 큰 혼란을 야기한다.
역대 최다 승리 드라이버, 최다 챔피언 타이틀 등 수십 년간 축적된 데이터의 연속성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슈퍼6000의 기록을 Super S1이 그대로 계승한다”고 선언하더라도, 규정과 명칭이 완전히 바뀐 상황에서 통산 데이터의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는 대한민국 모터스포츠 아카이브의 파편화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세 번째는 승급제 도입을 위해 명칭 변경이 필수적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가장 뼈아픈 지점은 ‘굳이 이름을 바꾸지 않아도 승급제 도입은 충분히 가능했다’는 점이다.
하위 클래스를 S2~S4 혹은 GT1~GT3 등으로 재편하더라도 최상위 클래스만큼은 ‘슈퍼6000’이라는 상징적 브랜드를 유지한 채 “GT 클래스 우승자에게 슈퍼6000 시트 승급 기회 제공” 형태로 설계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주최 측이 글로벌 표준이라는 명분에만 집착해 스스로 쌓아 올린 가장 강력한 마케팅 자산을 내던졌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든 이유다.
[결론] 전통 위에 혁신을 얹을 수는 없었나
슈퍼레이스의 2027년 로드맵은 대한민국 모터스포츠의 체질을 개선하고 선진국형 시스템으로 도약하겠다는 과감한 도전이다. 드라이버 육성 경로를 투명하게 열어두고 지속 가능한 환경을 만들겠다는 방향성 자체는 환영받을 만하다.
그러나 모터스포츠는 전술과 기술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스토리와 역사’를 먹고 자라는 스포츠다. F1, 나스카(NASCAR), 르망24시가 세계적인 권위를 갖는 이유는 수십 년간 전통의 가치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전통을 무너뜨리고 세운 혁신은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 슈퍼레이스 조직위원회가 2027년 전면 시행 전까지 ‘글로벌 표준 구축’이라는 명분과 ‘슈퍼6000이 가진 역사적 헤리티지(유산) 보존’이라는 가치 사이에서 완충지대를 찾을 수 있을지, 모터스포츠 팬과 관계자의 눈과 귀가 쏠리고 있다.
사진제공 = 한국모터스포츠기자협회, 슈퍼레이스 챔피언십


